우리 회사 막내 기획자는 초등학생입니다

초등학생이 모니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의견을 말하고 있다
2026년 7월. 아이가 화면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세 줄 요약

콘텐츠에 아이 의견을 반영한다고 했지만, 정작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 처음부터 같이 만든 적은 드물었다.

자리를 내주자 어른이 못 하던 상상이 쏟아졌고, 그날 나온 의견 예순다섯 개를 그 주에 전부 반영했다.

정답도 순위도 없는 게임이 좋다고, 아이는 그 이유까지 말했다.

콘텐츠를 만들면서 아이들 의견을 많이 반영한다고 했지만, 돌아보면 늘 부족했다. 몇 번은 반영했어도 손에 꼽을 만큼 제한적이었고, 정작 그 콘텐츠를 쓰는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어 처음부터 같이 만든 적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우리가 아이를 확인하던 방법

어른들끼리 모여 앉아 아이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하고 말하곤 했다. 자료를 분석하고 리서치 회사에 모니터링을 맡기고, 선생님과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얻어 이것이 아이들이 원하는 콘텐츠라고 정리했지만, 그 근거는 대개 각자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기억이었다.

그렇게 만든 걸 두세 군데 초등학생에게 보여 주고 어때요, 하고 묻는 한 시간짜리 테스트가 전부였으니, 확인은 했어도 함께 만든 적은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결과를 확인받는 대신, 처음부터 같이 만들기로.

아이가 크루와 함께 출근한 날

2026년 7월의 어느 날, 아이가 크루와 함께 출근했다. 손님으로 잠깐 들르는 방문이 아니라 하루를 같이 보낸 출근이었고, 퇴근 시간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기획하고 테스트했다. 지치는 쪽은 늘 어른이었다.

사무실에서 크루들과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
손님이 아니라, 하루를 같이 보내는 자리로.

아이는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워했는데, 자기가 말한 게 화면에서 바뀌는 걸 그날 내내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크루가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설명하고 있다
2026년 7월. 아이에게 설명하고, 상상할 시간을 준비하는 시간.

처음엔 어른이 설명하고 아이가 듣는 자리였지만, 어느 순간 화면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그때 화면에 떠 있던 건 캐릭터의 감정별 목소리를 녹음하는 도구였고, 아이는 한 문장을 짚으며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캐릭터가 되었다

그날 아이는 듣기만 하지 않고 직접 문장을 읽고 녹음했다. 화가 난 목소리, 신난 목소리, 궁금해하는 목소리를 하나씩 나눠서.

그 녹음이 지금 캐릭터 누리의 목소리 기준이 되었고, 아이가 낸 소리의 결을 따라 누리가 말한다. 그러니 누리가 "같이 따라가 볼까?" 하고 물을 때 그건 어른이 상상한 아이 말투가 아니라, 진짜 아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디자이너와 아이가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기획 회의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게 기획이었다.

아이의 상상은 우리와 달랐다

일주일 뒤에 아이가 우리가 만든 놀이 아홉 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 봤는데, 돌아온 얘기는 어른의 기획서에 없던 것들이었다.

하나. 나무에 불을 가져가면. 우리는 불을 위험한 것으로 두고 막을 생각부터 했는데, 아이는 달랐다. 나무가 타서 없어지면 그 자리에 씨앗 세 개가 남고, 그 씨앗을 모아 물을 주면 새 나무가 자란다고 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가서, 새로 자란 나무는 사과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나 배나무여야 한다고도 했다. 같은 게 돌아오면 재미없으니까.

둘. 비 오는 날 줄넘기를 들면. 어른 머릿속에서 비에는 우산이 정답이고 줄넘기는 틀린 선택이라, 막거나 틀렸다고 알려 주는 화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이의 답은 달랐다. 줄넘기로는 비를 막을 수 없다고 캐릭터가 말하고는, 그대로 비를 맞으며 줄넘기를 하다가 그래도 기분이 좋다고 웃는다.

틀린 걸 틀렸다고 하지 않고 다른 즐거움으로 이어 버린 것인데, 우리가 원칙으로 적어 둔 걸 아이가 먼저 장면으로 만들어 온 셈이었다.

셋. 자고 있는 아빠 캐릭터를 누르면 얼굴에 낙서가 생긴다. 여기까진 어른도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 얘기는 다음 날 아침으로 건너뛴다. 아빠는 낙서한 얼굴 그대로 출근하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그걸 발견하고 놀라고, 뒤따라온 두 아이가 같이 웃으며 끝난다.

시간을 건너뛰고 반전으로 닫는 3막을, 아홉 살이 만들어 온 것이다.

넷. 양말은 같은 색끼리 짝을 짓는다는 게 우리가 만든 정리 놀이의 규칙이었고, 분류를 배우는 흔한 방식이기도 했다. 아이는 색이 서로 달라도 짝이 된다고, 짝짝이 양말도 멋지다고 했다. 정답을 하나로 두지 않는 쪽을 고른 것이다.

크루 세 명과 아이가 모니터에 띄운 색칠 밑그림 세 장을 함께 보고 있다
그림도 아이와 함께 골랐다.

재미의 이유까지 말할 수 있었다

놀란 건 뭐가 재미있는지가 아니라, 왜 재미있는지를 아이가 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게임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내 맘대로 이어도 되고, 정답도 없고, 순위도 없고, 자유롭게 하는 게임이 좋아요.

우리가 문서에 적어 둔 원칙과 같은 말이었다. 점수로 줄 세우지 않기, 틀렸다고 표시하지 않기, 남과 비교하지 않기. 어른들은 거기 닿기까지 회의를 하고 자료를 읽고 근거를 모았는데, 아이는 그걸 한 문장으로 말했다.

의견 예순다섯 개를 그 주에 반영한 방법

그날 돌아온 의견이 예순다섯 개였고, 우리는 그걸 전부 반영했다. 골라서가 아니라 전부.

버섯은 눌러서 썰고 불에 올려야 익는데, 알맞게 익는 순간이 있고 더 두면 탄다. 탄 건 캐릭터가 먹지 않는다. 떡볶이를 주면 매워하며 우유를 찾고, 여러 번 먹으면 배가 불러 화장실에 갔다가 홀쭉해져 돌아온다.

예전 같으면 이 목록은 회의록에 남았을 것이다. 다음 회의에서 우선순위가 매겨지고 아래쪽 절반은 조용히 사라졌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다섯이 터미널에서 일하고, 얘기를 들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고친다.

그날 오후 아이는 태블릿을 들고 방금 고쳐진 화면을 눌러 보고 있었다. 말한 사람이 결과를 확인하는 데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아이가 태블릿으로 게임 화면을 직접 터치하며 테스트하고 있다
고친 화면을 그 자리에서 눌러 본다.
아이가 원한 건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였다.

한 달 뒤에도

한 번의 방문은 이벤트여서 사진 몇 장 남기고 끝나기 마련이고, 우리도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난 어느 아침에 아이는 다시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이번엔 퀴가의 점 잇기 게임이었고, 옆에서 어른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러니까 이벤트가 과정이 된 것이다.

아이가 스탠드에 세운 태블릿으로 점 잇기 게임을 하고 있고 옆에서 어른이 작업하고 있다
한 달 뒤에도 같은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일을 시키는 건가

당연히 나올 질문이고, 답은 아니다. 아이는 보호자와 함께 사무실에 오고 하고 싶을 때만 화면을 본다. 아이에게 이건 노동이 아니라 놀이의 연장인데, 다만 자기가 고른 게 진짜 화면에 들어가는 놀이다.

그 기분은 어른의 것과 다르지 않아서, 내 의견이 세상에 반영되는 경험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옆에서 보며 알았다.

직함이 아니라 거리

아이의 상상은 우리 생각과 달랐다. 엉뚱했고, 우리의 찌든 경험과 상업적 계산과 학교에서 배운 옳고 그름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래서 기획자를 정하는 기준이 바뀌었는데, 경력의 길이가 아니라 사용자와의 거리다.

아이 콘텐츠에서 사용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이이고, 이보다 분명한 기준을 우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엔 초등학생 기획자가 있다. 명함은 없지만 그가 낸 의견은 지금 서비스 안에서 돌아가고 있고, 그 목소리는 캐릭터가 되어 아이들에게 말을 건다.

당신 곁의 가장 가까운 사용자는 누구인가

어느 팀에나 회의실 밖에 진짜 사용자가 있고, 우리에겐 그게 아이였을 뿐이다. 그 사람을 화면 앞에 데려오는 데 대단한 프로세스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자리 하나와, 그 말을 그 주에 반영할 준비면 충분했다.

막내 기획자의 검수를 통과한 화면은 퀴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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